2007. 3. 30. 08:24


이야기 파는 남자 | 원제 Sirkusdirektorens Datter
요슈타인 가아더 (지은이), 박종대 (옮긴이) | 이레 |
ISBN 89-5709-059-2 03890 | 2005. 10. 25.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낚인 책이다.

표지에 적혀있는 글에는 분명 이런 말이 있었다.
'전 세계 베스트셀러를 둘러싼 충격적인 뒷거래 이야기!'
순진하게도 나는 이 글을 보고는 이 책이 실화를 배경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소설인지 알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전에 너무도 읽히지 않는다며 적은 이 책은 읽는데 꼬박 5일이 걸렸고, 그마저도 정독이 아닌 날림으로 읽은 책이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전에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읽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아는 것들을 여지없이 추락시켜버리는, 그런 느낌에서인지 완강하게 머릿속에서 거부하고 있다. 아마 그건 책과 소설을 두고 불유쾌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떄문일 것이다. 왜냐면 똑같이 소설을 들고 이야기하는 '제인 에어 납치사건'은 너무 재미있게 봤고 추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기발한 소설적 상상력에 놀랐었는데, 과연 이 책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술을 한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동화, 혹은 슬픈 동화 등의 액자소설들과는 너무도 다른 본소설의 이야기.
이야기꾼과 소설가, 그 둘의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구성의 허술함과 완벽함에 있다고 보고 싶다. 단순한 이야기라는 것은 듣고 지나가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이해를 전제로 시작되고 경청되어지지만 소설은 구성에 있어 허술함이 있다면 비판하며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이야기꾼 주인공은 수많은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단 한편도 소설화하지 않고 창작물을 파는 즐거움에 빠져있다. 창작물의 거래가 문제시 될 것은 없지만, 마치 태생이 숨겨진 훔쳐다 키운 아이로 작품을 발표하는 소설가들이나 자신의 아이를 내다 팔아 부를 누리는 이야기꾼은 분명 도의적 책임과 양심의 꺼리낌은 있어야할 것이다. 페테르는 분명 그런 마음이 없었다.

결국 결말은 끔찍했다. 거미가 줄을 치다가 자신의 새끼를 잡아먹은 꼴을 하고 있다.


좋은 소설이라 수많은 사람들과 비평가가 이야기하여도, 내게 와닿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면 내게는 그게 좋은 소설일 수 없다. 그래서 저마다의 취향이 있고 저마다의 애장서가 다 다른 것이다. 근래에 와서 드는 생각은 창작자가 가진 의도를 빗겨서 그 창작물을 접한 사람이 인식한다면 누구의 잘못인가이다. 수없이 많이 밑줄을 그어가면서 반복적으로 익혀왔던 문학의 접근 방식을 이젠 내 스스로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화자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을 굳이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내게 느껴지는 그것이 바로 내 책읽기가 아닐까.

그나저나 권해준 사람에게는 뭐라 해야하지? '그 책 전 별로던데요?'
Posted by seha